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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박사는 천재로 태어나 신동으로 자랐습니다. 그 당시 일본은 백제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왕인박사는 일본에서 백제에 초청 요청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일본왕을 포함한 일본인들에게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 결과 일본 아스카 문화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매년 왕인박사의 추모제가 행해집니다. 그것이 영왕왕인문화축제입니다.
영암왕인문화축제
왕인박사는 백제 제14대 근구수왕 때에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서 태어나셨습니다. 8세 때세때 월출산 주지봉 기슭에 있는 문산재에 입문하셨습니다. 유학과 경전을 공부하였습니다. 문장이 뛰어나 18세에 오경박사로 뽑혔습니다. 이때 백제는 고구려의 계속적인 침략으로 국가가 멸망할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태였습니다. 17대 아신왕은 지금의 일본과 수교를 맺고 황자의 자리를 이을 황제의 아들을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일본왕 응신은 백제의 태자전지가 일본에 온 지 백제의 태자를 다시 고국으로 돌려보내면서 훌륭한 학자를 청하였습니다. 백제 17대 아신왕 때에 왕인은 일본 응신천왕의 초청을 받아 영암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왕인의 나이는 32이었습니다. 상대포는 국제 무역항으로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을 갈 때에도 이곳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왕인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도공, 야공, 와공 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쳐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일본가요를 창시하고 기술 공예를 전수하여 일본인들이 큰 자랑으로 여기는 아스카문화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일본사회의 정치 경제와 문화 예술을 꽃피웠습니다. 왕인박사의 묘지는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 있습니다. 1938년 5월 오사카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왕인박사의 탄생지인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는 왕인박사 유적지를 정화하여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였습니다. 매년 양력 4월 초에 왕인박사 추모제를 행하고 있습니다. 왕인 박사 추모제가 지금의 영암왕인문화축제입니다.
왕인박사유적지
왕인박사유적지는 구림마을의 동쪽 문필봉 기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왕인이 새롭게 주목받게 되면서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복원해 놓은 곳입니다. 왕인박사의 탄생지인 성기동과 박사가 마셨다고 하는 물을 담아두는 그릇이 있습니다. 탄생곳 옆에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월출산 중턱에는 박사가 공부했다는 책굴과 문산재, 양사재가 있습니다. 문산재와 양사재는 박사가 공부하면서 고향에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길러 낸 곳입니다. 책굴 앞에 왕인박사의 모습을 돌로 형상화하여 만든 조형물이 있습니다. 박사의 후한 덕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성기동성기동 서쪽에 있는 돌정고개는 박사가 일본으로 떠날 때 동료와 문하생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면서 정든 고향을 뒤돌아 보았다 하여 돌정고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상대포는 박사가 일본을 떠날 때 배를 탔던 곳입니다. 그 당시의 국제 무역항이었습니다. 왕인박사는 백제인으로 일본 응신천황의 초빙으로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엄청난 경서의 지식으로 응신천황의 신임을 받아 태자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일본의 문화를 깨우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은 대대로 학문에 관한 일을 맡고 일본 조정에 봉사하여 일본 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화이길사, 일본서기에는 왕인이라고 그의 이름이 나타나있습니다. 왕인박사는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것은 물론 기술공예의 전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가요의 창시 등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일본 황실의 스승이며 정치고문이 되었습니다. 백제문화의 전수를 통하여 일본 사람들을 계몽한 일본문화사상의 성인으로 일본 비조문화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이 유적지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사당을 비롯한 유적지정화사업을 시작으로 왕인공원 등 성기동 문화관광사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백제의 문물 받아들이기 위해 혈안이 된 일본
일본은 백제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백제와 일본의 정치적, 문화적 의논은 근초고왕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두 나라는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래서 삼국 중에서 일본과 가장 많은 문화적 교류를 해 온 나라는 백제였습니다. 한편, 박사 왕인은 문산재에서 학덕이 높은 군자였습니다.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지도자였습니다. 그에게 배우려고 하는 제자들로 문산재와 양사재는 비좁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박사 왕인의 나이 27세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73세였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부모를 섬겨왔던 그는 너무나도 슬프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다음 해 박사 왕인은 문산재의 상좌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8세의 나이로 문산재에 입문하던 날, 그 영특하고 명쾌한 답변으로 노교수와 서생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신동 왕인도 이제는 어엿한 대학자가 된 것입니다. 백제의 존경받는 선비인 박사 왕인은 일본 황실의 사부가 되어 두 명의 태자 토도치랑자와 대초요 존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일본에 건너갈 때 가지고 갔던 '천자문'과 '논어' 뿐만 아니라, 모든 유교사상과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왕인은 태자의 스승뿐이 아니라 신하들에게 한문과 불교도 가르쳤습니다. 백제인 왕인으로부터 한문을 전해 받은 일본은 비로소 눈이 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유교 덕목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미개했던 일본은 비로소 한문을 연구하는 학문이 시작하게 되었고 문화가 발전하기 위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